메이저리그(MLB) 백업 내야수로 시작해 3년 만에 리그 상위권 선수로 인정받았다. 김하성(29·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이 MLB 선수 랭킹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com은 7일 2024시즌 빅리그 선수 랭킹 톱 100을 발표했다. MLB 사무국에서 운영하는 중계 채널인 MLB 네트워크는 매년 시즌을 앞두고 선수 순위를 발표하는데, 7일에는 81위부터 100위까지가 먼저 발표됐다.

하위권에는 대부분 지난해 랭킹에 없던 선수들이 포진했다. 100위인 엘리 데 라 크루즈(신시내티)를 비롯해 81위까지 20명의 선수 중 16명이 지난해 100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그나마 2023년 랭킹에 있던 선수들은 모두 순위가 떨어졌다. 82위 윌슨 콘트레라스(세인트루이스)는 지난해 73위였고, 89위 맷 채프먼(FA)은 14계단 하락했다.

많은 선수들이 새로 이름을 올린 가운데, 김하성 역시 88위에 오르며 데뷔 후 처음으로 톱100 안에 들었다. 메이저리그의 시즌 액티브 로스터(active roster)는 26자리다. 30개 구단을 합하면 780명이 뛰는 셈이다. 이 중에서 88위라면 상위 11.3%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한국인 선수로는 지난 2021시즌을 앞두고 토론토 블루제이스 소속이던 류현진(37·FA)이 39위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김하성의 밑에 위치한 선수들을 보면 그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아래인 89위에 있는 채프먼은 공수를 겸비한 3루수 자원으로 평가받는다. 90위 조던 몽고메리는 이번 FA(프리에이전트) 시장에서 블레이크 스넬과 함께 ‘좌완 톱2’를 형성하고 있다. 그 밑으로도 91위 네이선 이볼디(텍사스)는 지난해 팀의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92위 딜런 시즈(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준수한 선발 자원으로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트레이드 매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만큼 김하성이 이런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김하성이 같은 곳에서 선정한 2024시즌 메이저리그 2루수 랭킹 톱10에는 이름도 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올 시즌 2루수로 완전 전향할 예정인 무키 베츠(다저스)가 1위를 차지한 가운데, 호세 알투베(휴스턴)이 그 다음 자리에 위치했다. 3위 마커스 시미언(텍사스)에 이어 루이스 아라에즈(마이애미), 케텔 마르테(애리조나), 맷 매클레인(신시내티), 안드레스 지메네스(클리블랜드), 에두아르드 줄리엔(미네소타), 잭 겔로프(오클랜드), 니코 호너(시카고 컵스)가 4위에서 10위에 차례로 위치했다. 김하성의 이름은 볼 수 없었다.

어쨌든 김하성이 톱100 안에 들었다는 것은 그의 가치가 한해가 다르게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4년 신인드래프트 2차 3라운드 29순위로 넥센(현 키움)에 입단한 김하성은 2020년까지 KBO리그 7시즌 891경기에 출전해 타율 0.294, 133홈런 575타점, OPS 0.866을 기록했다. 2016시즌 생애 첫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한 그는 이후로도 꾸준히 활약하며 KBO 최고의 유격수로 자리매김했다. 2019년에는 한국시리즈 무대를 경험했고, 이듬해에는 30홈런, 109타점으로 자신의 장타력과 해결사 능력을 유감 없이 과시했다.

이런 활약 속에 김하성은 2021시즌을 앞두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4년 2800만 달러(약 373억 원)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 무대에 입성했다. 이는 아시아 내야수 역대 최고 금액이자, 올해 이정후(26)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6년 1억 1300만 달러(약 1500억 원) 계약을 맺기 전까지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KBO 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한국인 타자 중 최고 규모의 계약이었다.

그는 빅리그 첫 시즌 117경기에 나온 그는 주로 백업 내야수로 출전, 타율 0.202 8홈런 34타점 27득점 6도루 OPS 0.622의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활약에 나섰다. 2022년에는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의 손목 부상과 금지약물 적발로 인해 주전 유격수로 나와 150경기에서 타율 0.251 11홈런 59타점 12도루 OPS 0.708의 기록을 냈다.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과 도루를 달성했고, 전반적인 타격 생산력도 리그 평균 이상으로 올라섰다. 특히 수비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댄스비 스완슨, 미겔 로하스와 함께 내셔널리그 유격수 부문 골드글러브 최종 후보 3인에 이름을 올렸다.

주전급 선수로 등극한 김하성은 그러나 2023시즌을 앞두고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겨야 했다. 베테랑 유격수 잰더 보가츠가 샌디에이고와 11년 2억 8000만 달러(약 3717억 원)의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주로 유격수로 뛰었고, 가끔 3루수로 나왔던 적은 있었지만 2루수는 낯선 포지션이었다. 부동의 주전 2루수였던 서건창(현 KIA)의 존재로 인해 김하성은 키움 시절 데뷔 시즌인 2014년 단 6경기(1선발), 15이닝에서만 2루수 수비를 소화하는 데 그쳤다. 이에 우려 섞인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김하성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지난해 152경기에서 타율 0.260(538타수 140안타) 17홈런 60타점 84득점 140안타 38도루 OPS 0.749의 기록을 냈다. 비록 9월 이후 부상과 슬럼프로 인해 타율 0.176으로 부진하며 아시아 내야수 최초의 20(홈런)-20(도루) 달성은 무산됐지만, 홈런과 도루, 안타 등에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야구통계사이트 베이스볼 레퍼런스의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 5.8을 기록, 내셔널리그 전체 8위에 올랐다.

7월에는 타율 0.337, 5홈런, OPS 0.999를 기록하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또한 7월 23일부터 8월 8일까지는 2007년 스즈키 이치로의 아시아 선수 연속 멀티출루 기록(15경기)과 타이를 이뤘다. 또한 추신수(현 SSG)가 2013년 기록한 한국인 선수 연속 안타 기록(16경기)와도 동률을 만들었다.

다재다능함도 돋보였다. 김하성은 지난해 1루수를 제외한 내야 전 포지션을 돌아가며 뛰었다. 그는 2루수로 106경기(98선발)에 나와 856⅔이닝을 뛰었고, 3루수(32경기, 253⅓이닝)와 유격수(20경기, 153⅓이닝)에서도 뛰어난 수비력을 보여줬다. MLB.com은 “김하성은 올 시즌 샌디에이고 내야의 다재다능한 선수의 표본이었다. 주로 2루수로 출전하면서 3루수, 유격수로 뛰었는데 DRS(Defensive Run Saved·수비수가 얼마나 많은 실점을 막아냈는가를 측정한 지표)에서 2루에서 10점, 3루수와 유격수에서 각각 3점씩 기록했다. 2루에서 기록한 DRS 10점은 내셔널리그 공동 선두인 니코 호너(시카고 컵스)와 투랑(밀워키, 각각 12점)에 이어 가장 높은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활약 속에 김하성은 내셔널리그 유틸리티 부문 골드글러브를 수상했고, 실버슬러거 후보에도 올랐으며 한국인 역대 3번째로 MVP 투표에 이름을 올렸다(내셔널리그 14위). 특히 골드글러브의 경우 스즈키 이치로(2001~2010년)에 이어 아시아 선수로는 두 번째이자, 내야수로는 역대 최초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MVP 투표에서 표를 받은 것 역시 한국인으로는 역대 3번째였다. 추신수가 클리블랜드 시절인 2010년 아메리칸리그 MVP 투표에서 6위표 1장, 9위표 1장, 10위표 2장을 얻어 14위에 등극했고, 신시내티로 이적한 2013년에는 내셔널리그 MVP 투표에서 5, 6, 7위표 각 1장, 9위표 4장, 10위표 3장을 받아 12위에 올랐다. 이어 류현진(FA)이 2019년 LA 다저스 소속으로 내셔널리그 투표에서 7위표 1장을 얻으며 19위, 이듬해 토론토 이적 후 아메리칸리그에서는 8위표 1장을 받으며 13위를 거뒀다.

특히 여름 들어 성적이 오르고 있을 때는 현지에서도 MVP 후보 중 한 명으로 진지하게 거론됐다. 8월 중순 스포츠매체 ESPN이 ‘AXE(Award Index·어워드 인덱스)’라는 지표를 통해 매긴 내셔널리그 MVP 예상 결과에서 김하성은 5위에 올랐다. MLB.com이 실시한 모의투표에서도 김하성은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9월의 부진만 없었다면 충분히 더 높은 결과를 냈을 것이 유력했다.

김하성에 대한 호평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미국 매체 뉴욕 포스트는 2023시즌 부문별 가장 뛰어난 선수를 선정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투타겸업’ 오타니를 제외한 최고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준 선수로 베츠 다음으로 김하성의 이름을 꺼냈다.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김하성도 베츠만큼 여러 위치에서 모두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2023시즌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올해 내셔널리그 MVP 2위였던 베츠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린 김하성은 벌써 다음 스토브리그에서 주목할 FA 자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는 2025년 1000만 달러(약 133억 원) 뮤추얼 옵션(상호 합의 조항)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행사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스포츠매체 더 스코어는 5일 2024년 메이저리그(MLB) FA 톱 20을 선정했는데, 김하성은 15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뮤추얼 옵션을 행사하지 않고 다음 겨울에 팀에서 나올 것이다”고 전망한 매체는 “눈에 띄진 않지만 탄탄한 타격 능력, 뛰어난 주루와 세 포지션(2루수, 3루수, 유격수)에서 보여준 훌륭한 수비를 앞세워 흥미로운 내야수 옵션으로 등극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매체는 “다른 FA 내야수보다 어린 김하성의 나이도 선수 본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고 전망했다. 함께 FA 시장에 나오는 수준급 내야수 중 알렉스 브레그먼(휴스턴)은 김하성보다 한 살 많은 1994년생이고, 알투베는 1990년생으로 내년이면 30대 중후반으로 접어든다. 그나마 글레이버 토레스(뉴욕 양키스) 정도가 김하성보다 한 살 어릴 뿐이다.

김하성은 지난달 17일 또다른 매체인 CBS스포츠에서 발표한 FA 랭킹에서는 6위에 올랐다. 후안 소토(뉴욕 양키스), 브레그먼, 코빈 번스(볼티모어), 잭 휠러(필라델피아), 알투베 등 쟁쟁한 선수들이 차례로 ‘톱5’를 형성한 가운데, 김하성이 이들 바로 다음 순위에 위치했다. 매체는 “김하성은 메이저리그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비 기술 세트와 단타, 볼넷, 도루 등 꾸준한 활약에 힘입어 연속적으로 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기여) 5승 시즌을 보냈다”며 “그는 (올해도) 흥미로운 한 해를 보낼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샌디에이고와 김하성은 2025년 뮤추얼 옵션(상호 합의 조항)을 지니고 있다”고 현 상황을 소개했다.